본문: 사무엘상 1장 9–18절
중심 말씀: 사무엘상 1장 18절 —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서론 — 기도했는데도 현실은 그대로일 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몸은 여전히 아프고, 자녀에게서는 연락이 없고, 해결해야 할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합니다. ‘내 기도가 하나님께 닿기는 했을까?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그러나 기도의 응답을 눈앞의 변화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바꾸시기 전에, 그 환경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을 먼저 붙들어 주시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한나가 그렇습니다. 한나는 오랫동안 자녀가 없었습니다. 남편 엘가나는 한나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만으로 한나의 깊은 아픔을 모두 채워 줄 수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브닌나는 그 약한 부분을 건드리며 한나를 괴롭게 했습니다. 한나는 울었고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이때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녀가 없다는 사실을 믿음이 부족하거나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증거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고통받는 한나를 정죄하도록 우리를 부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한 사람의 마음을 보게 합니다.
한나의 문제는 하루 이틀 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해마다 반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러 올라가는 길에서도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다른 사람은 감사의 제물을 드리는데, 자신은 눈물을 감추어야 했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있다고 해서 아픔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한나가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기도한 뒤, 아직 아이를 얻지 못했는데도 음식을 먹기 시작합니다. 얼굴에서도 근심의 빛이 사라집니다. 상황이 달라지기 전에 한나가 달라진 것입니다.
무엇이 한나를 다시 일어서게 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기도를 돌아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마음의 괴로움을 하나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10절을 보면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 하나님께 기도하며 통곡했습니다. 한나는 울지 않는 사람이 된 뒤에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마음을 다 정리한 뒤에 하나님께 나온 것이 아니라, 정리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 앞에서도 괜찮은 모습을 보이려고 합니다. 믿음이 있으니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입술로는 괜찮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무너져 내릴 때가 있습니다. 사람 앞에서 참았던 눈물이 혼자 있는 방에서 쏟아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꾸며진 대답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프다고 말씀드려도 됩니다. 두렵다고 말씀드려도 됩니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백해도 됩니다. 믿음은 아픔을 숨기는 능력이 아니라,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한나의 주변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남편도 있었고 가족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한나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엘가나는 자신이 한나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않으냐고 말했습니다. 사랑해서 한 말이었겠지만, 한나의 상처가 그 말 한마디로 낫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가까운 가족이 있어도 설명하기 어려운 아픔이 있습니다. 위로하려고 하는 말인데 오히려 더 외로워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마음의 문을 모두 닫아 버리지 마십시오. 하나님께로 향하는 문은 열어 두십시오.
15절에서 한나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고 있다고 말합니다. 마음을 쏟는다는 것은 마음속에 있는 것을 감추지 않고 내어놓는 것입니다. 같은 염려를 붙들고 혼자 맴도는 대신, 그 염려를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생각을 많이 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다릅니다. 밤새 문제를 생각해도 마음은 더 무거워질 수 있습니다. 기도는 그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올려 드리는 일입니다. ‘주님, 제가 이 일을 혼자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제 마음과 형편을 주님께 맡깁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도하는 사람이 도움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족과 성도와 필요한 사람들의 손길을 통해서도 우리를 도우십니다. 중요한 것은 도움을 구하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한나의 눈물은 하나님 앞에 머물렀습니다. 브닌나의 말이 한나의 마지막 이야기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조롱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 자신의 사정을 아뢰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께 가져가야 할 마음이 있습니다. 오래된 서운함, 말하지 못한 두려움, 가족을 향한 염려가 있습니다. 그 마음을 혼자 품은 채 지쳐 가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가져가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말뿐 아니라, 말이 되지 못한 탄식까지도 아십니다.
2. 사람의 오해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머물러야 합니다.
한나가 오래 기도하고 있을 때 제사장 엘리가 그 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한나는 입술만 움직이고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엘리는 그 모습을 보고 술에 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마음 아픈 일입니까? 가정에서 상처를 받고 하나님의 집에 왔는데, 그곳에서도 오해를 받았습니다. 가장 간절한 순간에 가장 뜻밖의 말을 들었습니다. 위로받아야 할 자리에서 자신의 진심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힘을 다해 섬겼는데 다른 뜻이 있는 것처럼 오해받기도 합니다. 조용히 견디고 있는데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사정을 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말이 마음을 깊이 찌를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하나님에게서도 멀어지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이제 그만하자. 더 기도해 무엇 하겠는가?’ 하는 마음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술에 취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슬픈 사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자신의 아픔을 솔직하게 말하면서도 기도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 말씀은 부당한 대우를 무조건 참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한나도 사실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잘못된 판단 앞에서 자신의 진실을 말했습니다. 다만 사람의 잘못된 판단이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끊어 놓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우리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아십니다. 사람은 눈물을 보고 연약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 눈물 속에서 주님을 붙드는 믿음을 보십니다.
동시에 우리는 엘리의 모습 앞에서도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우리도 누군가의 사정을 충분히 듣기 전에 판단하지는 않았습니까? 예배에 늦게 온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기 전에 책망하지는 않았습니까? 말수가 줄어든 성도를 보고 불평이 많아졌다고 단정하지는 않았습니까?
교회는 상처 입은 사람이 자신의 아픔을 설명하다가 더 지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들어 주고, 함께 기도하며, 다시 일어설 자리를 내어 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한나의 설명을 들은 엘리는 평안히 가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그 간구를 들어주시기를 빌었습니다. 처음에는 오해했던 사람이 이제는 축복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사람이 우리를 이해해야만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를 풀기 위해 노력하되, 끝내 사람에게 설명되지 않는 부분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우리의 삶을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믿는 자의 위로입니다.
사람의 말에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기도의 자리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을 다시 살피고, 잘못한 것은 회개하며, 억울한 것은 맡기십시오. 주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우리가 원망에 삼켜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3. 결과를 보기 전에도 하나님께 맡기고 걸어가야 합니다.
18절은 한나가 가서 음식을 먹었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의 빛이 없었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직 사무엘이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한나는 임신했다는 확인도 받지 못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여전히 같은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한나는 먹었습니다. 다시 일상을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슬픔 때문에 음식을 먹지 못했는데, 기도한 뒤에는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제를 다 해결한 뒤에 삶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긴 뒤에 오늘의 삶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한나가 어떻게 마음을 정리했는지 그 속의 생각을 성경이 모두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기도와 축복의 말씀 뒤에 나타난 분명한 변화를 보여 줍니다. 더 이상 근심이 한나의 얼굴과 일상을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기도에도 이런 변화가 필요합니다. 기도하면서 모든 짐을 내려놓았다고 고백했는데, 일어나자마자 그 짐을 다시 혼자 짊어질 때가 있습니다. 입술로는 맡겼지만 마음으로는 계속 결과를 통제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책임은 감당하되,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결과까지 내 손으로 붙들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했다면 사랑으로 연락하고 기다리는 일을 하십시오. 생계를 위해 기도했다면 오늘 맡겨진 일을 성실히 하십시오. 건강을 위해 기도했다면 필요한 치료와 돌봄을 받으십시오.
그러면서 결과는 하나님의 지혜에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기도한 뒤 오늘의 밥을 먹고, 오늘의 길을 걷고, 오늘의 책임을 감당하는 모습으로도 나타납니다.
우리는 사무엘상 1장의 끝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나를 기억하셨고, 한나는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했습니다. 그러나 18절의 한나는 아직 그 장면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결말을 읽지만, 한나는 결말을 모르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다음 장에 무엇이 기록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그러나 다음 장을 모르더라도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은 알 수 있습니다. 내일을 다 설명할 수 없어도 오늘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한나의 이야기를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응답받는다는 공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반드시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응답의 모양과 때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합니다. 우리가 붙들 약속은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여 내 뜻을 이루겠다는 확신이 아니라, 어떤 시간에도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후 한나는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기억했습니다. 사무엘을 얻은 뒤 자기 품에만 붙들어 두지 않고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보다 하나님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한나의 서원은 하나님과 거래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무엇을 바칠 테니 원하는 것을 달라고 흥정하는 기도를 가르치는 본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응답받은 이후에도 그 선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믿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녀를 주시면 주님 뜻대로 양육하겠다고 기도했는데, 정작 내 자랑으로만 삼지는 않습니까? 건강을 회복하면 섬기겠다고 기도했는데, 회복된 시간은 나만을 위해 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도의 열매는 얻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받은 것을 하나님 뜻 안에서 사용하는 데까지 이어집니다. 한나의 기도는 아들을 얻는 기쁨을 넘어, 그 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로 나아갔습니다.
결론 — 기도한 사람의 얼굴로 살아갑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나는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에게 충분히 이해받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괴로움을 하나님께 가져갔고, 오해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머물렀으며, 결과를 보기 전에도 다시 일상을 살아갔습니다.
오늘 우리도 기도하기 전과 똑같은 문제를 안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마음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두려움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마음의 괴로움을 하나님께 가져가십시오. 사람의 오해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마십시오. 결과를 다 보기 전에도 오늘 맡겨진 삶을 살아가십시오.
아직 달라진 것은 없어 보여도 하나님께 맡긴 사람은 다시 걸을 수 있습니다. 눈물로 기도한 사람이 감사로 밥을 먹고, 무거운 마음으로 들어온 사람이 소망을 품고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한 사람의 얼굴로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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