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 1: 6-10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가정

본문 말씀 (룻기 1장 6-10절)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7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들어가는 말

한 신실한 어머니가 아들이 군에 입대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군대에 가면 힘들 때가 많을 것이다. 그때마다 기도해라.” 그 아들이 전역한 뒤 선원이 되어 먼 바다로 떠날 때 어머니가 또 말했습니다. “아들아, 바다에서는 군대보다 더 힘들 때가 많을 것이다. 매일 기도해라.” 그리고 그 아들이 결혼할 때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결혼하면 군대나 바다에서보다 더 힘들 때가 많을 것이다. 늘 기도를 앞세워 살아라.”

웃음이 나는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 깊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가정은 저절로 행복해지는 곳이 아니라 세심하게 돌보고 가꾸어야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힘에는 한계가 있으니, 가정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셔야 합니다. 시편 기자도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시 127:1)라고 고백했습니다.

성도에게 가정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첫 번째 사명의 자리입니다. 성도의 가정은 날마다 예배하고 섬기는 ‘작은 교회’이고,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큰 가정’입니다. 작은 교회인 가정이 바로 서야 큰 가정인 교회도 건강하게 세워집니다.

오늘 본문은 모압 땅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일어난 나오미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나오미는 흉년을 피해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모압으로 갔지만,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남은 것은 늙은 시어머니와 이방 여인인 두 며느리뿐이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소망이 끊어진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가정을 통해 하나님은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가정을 축복하실까요?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6절을 먼저 보십시오. 나오미가 다시 일어선 계기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흉년이 들어 떡집에 떡이 없자 나오미의 가정은 하나님의 땅을 떠나 모압으로 갔고, 그곳에서 큰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정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무너진 가정이 회복되는 출발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돌보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분께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가정이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첫째, 사랑으로 함께하는 가정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유난히 ‘함께’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돌보시사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났습니다(6절). 두 며느리도 나오미와 ‘함께’ 유다 땅으로 가는 길에 올랐습니다(7절). 길을 가던 중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각자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권하자, 며느리들은 소리 높여 울며 말했습니다.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10절).

이 장면이 얼마나 놀라운지 생각해 보십시오. 모압 여인이 베들레헴에 가면 이방인으로서 멸시를 받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율법은 모압 사람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신 23:3). 남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시어머니에게는 재산도 없었으며 며느리들에게 다시 남편이 되어 줄 아들도 없었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시어머니를 따라갈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요즘 세상은 부모를 모시는 일을 짐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늙고 가난한 부모는 귀찮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취급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두 며느리는 자기 앞날보다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우리마저 떠나면 어머니는 누가 돌보나?’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고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둘째 며느리 오르바는 결국 시어머니의 권유를 받아들여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붙좇으며 고백했습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이 사랑의 결단이 룻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훗날 보아스는 룻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 2:12). 룻이 시어머니와 함께하기로 한 것은 단순히 정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가족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가족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고, 가족을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 위에 하나님의 날개가 덮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생명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꽃은 벌과 나비를 불러 열매를 맺고, 새들은 짝을 부르는 노래로 둥지를 틉니다. 사랑 없이 열매 맺는 생명은 없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번성하는 복을 받는 가정이 되려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사랑으로 함께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울고 웃는 가정에 하나님의 복이 머뭅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서로 얼굴을 마주할 시간이 없습니다. 같은 식탁에 앉아도 각자 휴대전화만 들여다보고, 같은 집에 살아도 서로의 하루가 어땠는지 묻지 않습니다. 몸은 함께 있어도 마음은 남남처럼 지내는 것입니다. 거창한 일부터 시작하지 않아도 됩니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하고, 짧게라도 함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정해 보십시오. 그 작은 ‘함께’가 쌓일 때 가정은 하나님이 머무시는 작은 교회가 됩니다.

둘째, 서로를 배려하는 가정입니다

사랑은 상대의 입장과 처지를 이해하고 그의 삶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이런 배려가 있을 때 가정의 갈등도 넉넉히 이겨 낼 수 있습니다.

나오미의 가정에는 갈등의 요인이 많았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는 오늘날에도 쉽지 않은 관계인데, 이 가정은 민족과 문화, 언어와 관습, 신앙까지 달랐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삶을 최대한 배려했습니다.

8절에서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며느리들을 내치는 말이 아니라, 딸처럼 사랑했기에 하는 말이었습니다. 두 며느리마저 떠나면 나오미는 의지할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자기만 생각한다면 며느리들을 붙잡는 것이 훨씬 유리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젊은 며느리들이 고향에서 좋은 남편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기를 바랐습니다. 자신의 외로움보다 며느리들의 행복을 먼저 생각한 것입니다. 며느리들은 그런 시어머니의 마음을 알았기에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나오미의 배려는 상대의 선택을 존중하는 데까지 이어집니다. 오르바가 돌아가기로 했을 때 나오미는 그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룻이 끝까지 함께 가겠다고 굳게 결심하자 나오미는 “그에게 말하기를 그쳤”습니다(룻 1:18). 사랑한다는 이유로 내 뜻을 강요하지 않고, 상대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결단하도록 기다려 주는 것도 깊은 배려입니다.

서로를 배려하는 이 마음이 있었기에 나오미 가정의 불행은 끝나고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배려가 없는 것은 대개 마음이 악해서가 아니라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배려는 가정과 교회에서 말씀을 통해 배우고 실천해야 할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4)고 권면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수고를, 아내는 남편의 짐을, 부모는 자녀의 마음을, 자녀는 부모의 연약함을 헤아릴 때 그 가정에 하나님의 평강이 넘치게 됩니다.

배려는 큰일보다 작은 일에서 드러납니다. 지친 얼굴로 들어온 가족에게 먼저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 상대가 말을 마칠 때까지 끝까지 들어 주는 것, 내 방식만 고집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서 주는 것이 모두 배려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엡 4:2)라고 말씀합니다. 용납한다는 것은 상대의 부족함까지 품어 준다는 뜻입니다. 서로를 고치려 하기보다 서로를 품어 줄 때 가정은 쉼이 있는 곳이 됩니다.

셋째, 서로 축복해 주는 가정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친정으로 돌려보내면서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8-9절).

나오미는 그때 인생의 가장 깊은 골짜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 속에서도 며느리들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귀하게 쓰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극심한 고난 중에도 서로 탓하지 않고 서로 아끼며 축복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선대하다’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는 언약에 근거한 변함없는 사랑, 끝까지 신실한 사랑을 뜻하며,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 자주 쓰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이 죽은 남편들과 자신에게 보여 준 사랑을 헤세드라고 불렀고,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헤세드를 베풀어 주시기를 빌었습니다. 사람이 서로에게 보인 신실한 사랑이,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구하는 축복의 기도로 이어진 것입니다. 축복이란 내가 줄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기를 구하는 사랑의 기도입니다.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난 중에 서로를 탓하지만, 복을 받는 사람은 고난 중에 서로를 감쌉니다. 고난 중에 남을 탓하면 고난과 불행은 더 깊어집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아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 며느리 탓을 하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은 상처 위에 식초를 붓는 것과 같습니다. 힘들 때일수록 입술을 지켜 나쁜 말이 나오지 않게 하고, 오히려 축복의 말을 하십시오.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주는 안타까운 사건이 있습니다. 몇 해 전 스페인에서 17살 네덜란드 소녀가 번지점프를 하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안전 줄이 아직 고정되지 않아 직원이 “노 점프(No jump)”라고 외쳤는데, 소녀가 이를 “나우 점프(Now jump)”로 잘못 알아듣고 뛰어내린 것입니다. 말 한마디가 생명을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말의 힘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1). 우리의 말이 무슨 신비한 주문이 되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을 들으시고, 그 말 속에 담긴 믿음과 불신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 14: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늘 믿음을 따라 말하십시오. 패배자의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언어를 쓰십시오. 그러면 생각과 태도가 바뀌고, 우리 가정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한 여인이 몸과 마음이 깊이 병들어,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말하지도 못한 채 집으로 옮겨졌습니다. 목회자였던 오빠가 소식을 듣고 찾아가 어두운 침실에 들어섰습니다. 그는 커튼을 활짝 열어젖히며 “빛이신 하나님, 이 방에 임하여 주옵소서!” 하고 기도한 뒤, 동생의 손을 잡고 “메리, 일어나 걸어라!” 하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동생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믿음이 깨어났고, 그녀는 일어나 걷기 시작했습니다. 훗날 오빠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느냐고 묻자 동생이 대답했습니다. “그때 일어나 걸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오빠가 “그건 내가 한 말이었어”라고 하자, 동생은 “아니에요, 저에게는 분명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성도의 입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건네는 축복과 격려의 말이 그에게는 하나님의 위로로 들릴 수 있습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한 가족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만남입니다. 서로에게 “네가 자랑스럽다”, “당신이 있어 감사하다”고 말해 주십시오. 약점보다 장점을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말해 주십시오. 우리 가족은 어쩌면 그런 말에 몹시 굶주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에게 백성을 이렇게 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 이 축복을 우리 가정에서 실천해 보십시오. 아침에 집을 나서는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짧게 축복해 주십시오. 잠들기 전 배우자를 위해 한 문장이라도 소리 내어 기도해 주십시오. 멀리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 감사와 축복의 말을 전해 보십시오. 매일 듣는 축복의 말이 그 사람의 마음에 쌓여 평생을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나가는 말

살다 보면 우리 가정에도 어려운 일이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때 절망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런 때에 희망을 말하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부모와 교회의 리더가 이런 모습을 보여 줄 때, 그것이 자녀와 성도들에게 평생 남는 가장 훌륭한 신앙 교육이 됩니다.

나오미의 가정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빈손으로 돌아온 나오미와 이방 여인 룻을 보아스와 만나게 하셨고, 룻은 오벳을 낳았습니다.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습니다(룻 4:17). 그리고 그 다윗의 가문에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마 1:5-6). 사랑으로 함께하고, 서로 배려하고, 서로 축복한 한 가정을 통해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이어 가셨습니다.

고향에 돌아올 때 나오미는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룻 1:20)고 말했습니다. ‘기쁨’이라는 이름 대신 ‘괴로움’이라는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룻기 마지막 장에서 베들레헴 여인들은 나오미에게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룻 4:15)가 있다고 축복합니다. 괴로움으로 시작한 가정이 기쁨으로 끝났습니다. 하나님은 빈손으로 돌아온 가정을 결코 빈손으로 두지 않으십니다.

어려울 때는 불평하고 절망할 때가 아니라, 믿음을 보여 드리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할 때입니다. 힘들 때에도 사랑과 믿음을 잃지 않고, 서로를 배려하며, 감사와 축복의 언어를 잃지 않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복이 우리의 삶과 가정에 임할 것입니다. 우리 가정과 자녀들 가운데에서도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귀한 사람들이 세워지기를 축원합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 가정을 주님께 올려 드립니다. 나오미와 룻처럼 어려울 때에도 사랑으로 함께하게 하시고,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 배려하게 하시며, 원망 대신 축복의 말을 나누는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가정이 작은 교회가 되어 주님의 이름을 높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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